우리나라 사람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하루도 빠짐없이 고추 혹은 고춧가루가 들어간 음식을 먹는 것 같다. 고추가 한국인의 입맛을 언제부터 사로잡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문헌에 의하면 고추는 대략 1600년대 중엽 도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추는 김치, 고추장을 비롯하여 매운탕, 라면 등 우리가 즐겨 먹는 대부분의 음식에 들어간다. 고추는 매운 채소의 대명사이지만 알고 보면 좋은 화학물질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번에는 고추에 포함된 화학물질에 대해 알아본다. |
고추에 포함된 화학 물질에 대해 알아보자. <출처: gettyimages>
탐스러운 빨강색에는 번식의 뜻이
과일이 익으면서 색이 변하는 것처럼 고추도 영글면서 색이 변한다. 어린 고추의 초록색은 엽록소(chlorophyll) 분자로 인한 것이다. 고추가 영글면서 엽록소 분자는 분해되기도 하고, 다른 물질로 변하기도 한다. 또한 엽록소의 초록색에 가려 있던 색소들이 유전자에 내장된 프로그램에 맞추어 시간이 되면 붉은색, 노란색 등을 띠게 되는데, 이런 모든 과정을 통해 고추의 색이 변하는 것이다. 식물의 열매가 화려한 것은 자연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후손을 번창시키려는 뜻이 담겨 있다. 짐승의 눈에 들어 열매가 많이 먹히면 결국에는 짐승의 이동 경로를 따라 식물의 씨가 널리 퍼지는 결과를 낳는다.
탐스러운 색깔의 빨간 고추는 초록 고추에 비해서 라이코펜(리코펜, lycopene) 혹은 케로틴(카로틴, carotene)과 같은 항산화물질을 더 많이 포함하고 있다. 라이코펜은 토마토와 같은 붉은 색 과일이나 채소에 많이 포함된 식물성 화학물질(phytochemical)이며, 케로틴은 비타민 A의 전구물질이다. 베타-케로틴이 많이 포함된 대표적인 채소로는 당근이 있으며, 당근 특유의 주황색도 케로틴 때문이다. 고추에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비타민(비타민 C, E)이 들어 있는데, 실험실에서 분석한 자료를 보면 고추는 오렌지(45 mg/100g)보다 더 많은 비타민 C(144 mg/100g)를 포함하고 있다. 그렇지만 비타민 C를 보충하기 위해서 오렌지 대신 고추를 찾는 사람은 드물 것 같다. 고추에는 엽산 또한 비교적 풍부하게 들어있다. | |
짐승의 눈에 들어 열매가 먹히면 결국에는 짐승의 이동 경로를 따라 식물의 씨가 널리 퍼지는 결과를 낳는다. 고추가 화려한 열매 색깔을 갖게 된 것에는 그러한 배경이 있다고 추측한다. <출처: (CC)Daniel Risacher at Wikipedia.org> |
베타-케로틴의 분자 구조. 빨간 고추에는 케로틴, 라이코펜의 항산화물질을 비롯해, 다양한 비타민과 엽산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 |
고추의 맵고 뜨거운 맛: 캡사이신
고추의 매운맛은 캡사이신(capsaicin)이라는 화학물질로부터 온다. 캡사이신 자체로는 색과 향이 없다. 캡사이신은 유기물질로 물에 잘 녹지 않고 기름에 녹는다. 고추에서 추출한 캡사이신은 진통 효과를 가지고 있다. 캡사이신으로 인해 통증 수용체가 계속해서 자극을 받게 되면 마침내 몸은 엔도르핀(endorphin)을 방출한다. 엔도르핀은 몸에서 분비되는 자연산 진통제이다. 매운 고추가 혀와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혀끝에서는 고통이 느껴지며, 몸에서는 땀이 나기 시작하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고통을 감내하기 위해서 우리 몸에서 ‘천연 마약’인 엔도르핀을 분비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한때 한국화학연구소 연구진이 캡사이신 유도체를 이용하여 진통제를 개발했다고 발표한 적도 있다.
매운맛을 내는 캡사이신 분자가 혀에 닿으면 혀 표면에 분포된 분자수용체(receptor)에 달라 붙는다. 그 후에 분자 수용체와 연결된 이온통로가 열리면서 칼슘이온이 방출되면 통증을 감지하는 신경세포가 활성화된다. 그 결과 세포에서 방출된 신경전달물질이 뇌로 전달되면 통증을 느낀다는 것이다. 결국 매운맛은 뇌에서는 통증으로 인식하고 있는 셈이다. 분자수용체로부터 캡사이신 분자가 분리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매운맛을 느낀다. 재미있는 사실은 매운맛을 감지하는 수용체와 뜨거움을 감지하는 수용체의 작동 메커니즘이 같다는 것이다. 약 43도 이상 되는 뜨거운 음식이 혀에 닿으면 매운맛을 느끼는 과정과 같은 일이 반복된다. 매운맛과 뜨거운 맛을 인식하는 수용체가 같아서 그런지 매운맛(spice hot) 혹은 뜨거운 맛(temperature hot)도 모두 영어로는 hot이다. | |
고추의 매운맛을 내는 화학물질, 캡사이신의 분자 구조. |
매운맛을 감지하는 수용체와 뜨거움을 감지하는 수용체의 작동 메커니즘은 같다. |
매운 고추를 먹고 나서 통증을 제거하려고 물을 먹는 것은 도움이 안 된다. 차라리 약간의 식용유를 혀끝에 돌려서 캡사이신을 녹여내는 방법이 과학적이다. 캡사이신이 물보다 기름에 더 잘 녹는 성질을 이용하는 것이다. 화학물질들은 극성 물질은 극성 용매에 녹고, 비극성 물질은 비극성 용매에 녹는다. 화학물질을 녹일 때 기본 원칙은 “끼리끼리 녹는다(like dissolves like)” 이다. 여기서 끼리끼리(같은 종류)라고 판단하는 한 가지 기준은 분자가 띠고 있는 극성의 정도이다. 예를 들어 물은 대표적인 극성 용매이며, 기름은 대표적인 비극성 용매이다. 그러므로 물에는 극성 분자들이 잘 녹고 기름에는 비극성 분자들이 잘 녹는다. 매운맛을 없애기 위해서는 비극성인 캡사이신을 혀 점막에 분포되어 있는 캡사이신 분자수용체로부터 분리시키는 일이 우선이다. 식용유를 입 안에 넣고 혀를 헹구면, 캡사이신이 비극성인 식용유에 녹으면서 분자수용체에서 떨어져 나와서 더 이상 매운맛을 느끼지 않는다. 식용유는 먹기가 괴로우니 효과는 좀 떨어지겠지만, 우유를 먹는 것도 도움이 된다. 우유 속 지방이 캡사이신을 녹일 수 있기 때문이다. | |
매운맛의 단위: 스코빌
매운맛의 강도를 비교하기 위해서 스코빌(scoville, SHU:scoville heat unit)이라는 단위를 사용한다. 매운맛의 단위를 처음으로 제안한 미국 과학자(Wilbur Scoville)의 이름을 딴 것이다. 예를 들어서 피망(green pepper)은 스코빌 단위로 1이며, 할라피뇨(jalapeno)는 약 5000 정도이다. 할라피뇨는 멕시코가 원산지인 고추다. 피자나 스파게티를 파는 식당에서 절인 오이와 함께 할라피뇨가 나오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매운 고추로 명성이 자자한 청양고추는 약 10,000 스코빌 정도다. 그러므로 일반 가정에서 즐겨 먹는 고추는 할라피뇨와 청양고추의 중간쯤 되는 스코빌 값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일반 고추는 청양고추보다는 맵지 않고, 할라피뇨보다는 맵다고 느껴 그렇게 추정을 한 것이다. 최근에는 분석기기를 통해서 고추에 포함된 캡사이신과 캡사이신 유도체의 양을 알아낼 수 있으므로 고추의 매운맛 서열을 보다 정확하게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매운맛이 대폭 줄어든 고추가 식탁에 오른다. 그 정도의 매운맛이라면, 아마도 피망과 같은 최저 스코빌 값이 아닐까 싶다. 기네스북에 오른 세계 최고 매운 고추들은 2백만 스코빌 이상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매운맛을 느끼는 정도는 사람의 연령과 고추에 대한 경험 유무에 따라 많은 차이가 나므로 스코빌로 표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참고 사항이다. 순수한 캡사이신은 약 천만(107) 스코빌 이상이 된다고 한다. 정말로 용감한 사람 혹은 매운맛을 못 느끼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감히 시도할 마음조차 가질 수 없는 매운맛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 |
멕시코가 원산지인 고추, 할라피뇨는 스코빌 단위 5000 정도의 매운맛
강도를 가지고 있다. |
호신용으로 제작, 판매되는 분무액에도 캡사이신이 첨가되어 있다. |
캡사이신이 첨가된 분무액과 새 모이
치한들을 물리치기 위해 캡사이신이 첨가된 분무(spray)액이 판매되고 있다. 분무액이 눈이나 피부에 분사되면 심한 고통이 따르도록 고안되어서 치한들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효과적으로 제압할 기회를 포착하거나, 줄행랑을 칠 기회를 잡을 수 있다. 포유동물을 퇴치하는 수단으로 캡사이신이 응용되기도 한다. 캡사이신을 첨가한 새 모이가 바로 그중 하나다. 다람쥐와 같은 동물들은 아주 심한 고통을 감내하면서 캡사이신이 첨가된 새 모이를 훔쳐 먹지 못하는 것 같다. 새가 캡사이신에 둔감한 것은 고추에게는 좋은 일이다. 새가 소화하지 못한 고추 씨가 새의 배설물에 섞여 떨어지면 새로운 고추나무가 자랄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장을 담글 때 빨간색 고추와 숯을 몇 개 정도는 띄웠다. 빨간색이 악한 기운을 물리친다는 주술적인 의미도 있겠지만, 캡사이신을 몰랐어도 고추에 포함된 화학물질이 곰팡이 혹은 잡균을 물리친다는 것을 알아낸 선조들의 지혜는 정말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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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네이버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