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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글은 수능으로부터 1년 이상의 시간이 남은 학생들에게 더 초점을 맞추어 보았습니다.

그동안 수험생 위주의 칼럼을 써 온 것 같아서요.

그리고 오늘 글은 다소 따끔한 조언일지도 모릅니다. 약간은 공격적인 것 같기도 합니다.

이제까지의 글과는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충격이 부디 도움이 되시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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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는 당신은 학생입니다.

“당신은 학생이고, 학생은 공부하는 사람이죠. 그러므로 당신은 공부해야 합니다.”

이는 어른들이 지겹도록 많이 써먹는 참으로 진부한 말입니다.

당신은 이 말이 옳다고 생각하나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당신 = 학생’의 연결이 잘못된 것이니까요.

당신은 ‘학생’이라는 한 가지 요소만으로 정의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요.

특히, 당신은 학생이기 전에 당신 그 자체니까.

그리고 당신은 공부하는 학생이기 전에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이니까 위의 논리는 틀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을 추구하는 것과, 책임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하기로 한 공부를 미룬다면 이는 행복해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겠죠.

그리고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이 행동은 불행을 가져옵니다.

이 행동은 행복 추구도 주체적 결단도 아니며 단지 의지의 부족일 뿐입니다.

자신이 하고자 한 일을, 게으름이나 두려움 등의 어리석은 감정들 때문에 실행하지 못한 것.

즉, 자신의 일을 자신 스스로가 통제하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의 몸과 정신을 자신의 의지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미성숙한 모습임이 분명하며,

더 나아가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기도 합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악’이라는 거죠.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악’을 은폐하기 위해 다양한 이유로 자기합리화를 합니다.

특히 학업에 대한 자기합리화는 학생 뿐 아니라 예전에 학생이었던 사람들에게서도 널리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나 옛날에 공부 참 잘했어’(우연히 한두 번 시험 잘 본 것을 추억하며),

‘공부 잘하면 뭐해, 인간이 되어야지’(그런 말을 하는 어른의 인격보다 공부 잘했던 어른의 인격이 훌륭한 경우가 많음),

‘공부 못해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어, 날 봐!’(남이 보기에는 별로 성공하지 못한 어른들이 많이 하는 말)

‘공부보다 학창시절의 추억과 우정이 소중한 거야’(실상을 보면 그다지 훌륭한 일을 한 추억이나, 좋은 친구가 없는 어른들이)

 

라고 이야기하는 어른들이죠. 어른이라 하여 항상 옳지는 않습니다.

부디, 열심히 공부할 의지를 가진 학생들이 이러한 어른들의 말에 괜스레 혹하여 

그 자기합리화를 받아들이지 마셨으면 합니다.

 

어른들까지 이런 실수를 범하는 것은

아마 ‘학업’이 현대 사회에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는 가장 보편적인 수단이기 때문일 겁니다.

자기 능력이 걸린 문제기 때문에 공부할 때로부터 멀어진 어른들까지도 억지를 부리는 경우가 있는 것이죠.

 

자기합리화는 당신을 병들게 합니다.

사람의 몸에 이상이 생기면 몸은 스스로 이를 회복합니다. 그러나 이 회복이 방해를 받으면 병이 되지요.

마찬가지로 당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이를 자기합리화하게 되어 문제를 스스로 극복하지 못하면 당신의 모습은 병들어갈 겁니다.

 

자기합리화는 당신의 마음에 굳건한 벽을 쌓기 때문에, 문제가 쌓이고 쌓여도 당신은 그 문제점들을 외면하게 됩니다.

벽 뒤에 숨어서 ‘난 괜찮아’라는 자기 위안만을 일삼게 되는 거죠.

그리고 세상을 탓하게 됩니다. 세상이 자꾸 당신을 괴롭힌다고.

하지만 당신을 괴롭히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당신이 나태하여 하지 않은 일들입니다.

그 일들이 쌓여서, 게으름 부린 업보들이 쌓여서 당신을 괴롭히는 거죠.

 

그러면 지금부터 대표적인 자기합리화의 사례들을 열거하고 분석해 보도록 합시다.

언제까지나 자기합리화의 벽 뒤에 숨어 살 수는 없으니까요.

벽을 뚫고 나가서 당신의 문제들을 훌륭하게 해결하면

당신 앞에는 ‘당신을 괴롭히는 세상’이 아니라 ‘아름다운 장밋빛 세상’이 펼쳐질 겁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는 점수가 꾸준히 나오거나, 끝내 원하던 대학에 합격했다면,

그것이 어째서 ‘당신을 괴롭히는 세상’이겠습니까?

 

 

 

1) 난 공부를 못하지만 내 곁에 진정한 친구들이 있다.

- 당신이 공부를 잘 하게 되면 친구가 없어지나요?

이는 공부와 우정을 반비례관계로 엮는 오류를 범한 자기합리화입니다.

오히려 공부 열심히 하는 학생들 주변에 친구가 더 잘 모입니다.

물론 지금은 공부하기 바빠서 인간관계가 소홀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고 어른이 되어서 보면 또 달라집니다.

단지 그 사람이 성공해서 인기가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을 성실하게 정확하게 처리하는 그 성격이 믿음직하기 때문에 주변에 사람이 잘 모이는 거죠.

친구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朋友有信)이니까요.

이런 말로 자기합리화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꼭 공부하기 싫어하고 게으른 학생끼리 모여 친구가 되어서

“공부는 못 해도 우리에겐 우정이 있어!”라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2) 난 공부는 못하지만 잘 논다. 공부만 잘하는 찌질이는 한심하다.

- ‘공부 잘 하는 능력’을 습득하는 것은 어렵지만, ‘잘 노는 능력’을 습득하는 것은 너무나도 쉽습니다.

이는 단지, 학생 시절에 여유를 누리지 못하는 우리나라의 구조 때문에 일어나는 착각입니다.

중고등학교에서 대학교를 넘어가는 순간 여가시간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구조!

지금 공부만 잘하는 애들이 놀 줄 모르는 이유는, 쥐꼬리만큼 적은 여가시간을 공부에 쓰기 때문입니다.

지금 잘 노는 애들은 그 쥐꼬리만큼 적은 시간으로 자신의 ‘잘 노는 능력’을 개발하고 있는 거고요.

그런데 대학생이 되어서 지금보다 훨씬 많은 양의 여가시간이, 공부만 하던 학생과 노는 학생에게 동시에 주어진다면?

둘의 노는 수준은 1년 이내로 비슷해지고, 3년 이내로 똑같아집니다.

‘잘 노는 학생’이 학창시절에 쥐꼬리만큼 연습한 능력은 유의미한 차이를 내지 못하고 묻혀버리는 거죠.

‘놀았던 자들’은 나중에는 용돈이 궁해서 놀 줄 알아도 못 놀게 됩니다.

대학교의 급에 따라 알바의 급도 달라지니깐.

더 나중에는 ‘열심히 살아 온 사람’이 해외여행이니 레저니 할 때 그들은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신다고 하네요.

참고로 날라리들의 전성기는 대체로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끝나버립니다.

성인이 되는 순간 담배를 피거나 오토바이를 타는 것이 더 이상 특별한 것이 아닌 게 되죠.

싸움을 잘 하는 것은 법적 책임에 막혀버리고...... 모든 능력이 무력화된 그들에게 남는 것은 초라한 대학교 학생증뿐입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60년 인생에서 6년 재미 보고 나머지는 시궁창입니다.

 

3) 나는 공부 외의 다른 것으로 성공할 거다.

- 정말로 공부 외의 다른 것에 재능이 있으신 지를 묻고 싶습니다.

단지 지금 코앞에 놓인 공부가 너무 싫어서 그걸 대충 해 놓고, ‘난 다른 길이 더 낫구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지금은 다른 길들이 더 편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 길들은 아마 지금 당신 눈앞에 놓여있지는 않을 테니까요.

학생 신분에 갇힌 당신을 24시간 괴롭히는 공부와는 달리. 

하지만 그것들도 일단 착수하고 보면 생각지도 못한 어려움들이 많을 겁니다.

무슨 일이든 항상 멀리서 보면 쉬워 보이지만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면, 부딪쳐 보면 의외로 힘든 법이니까요.

당신이 어딜 가든 경쟁이 있습니다.

인간의 욕망이 현실의 재화보다 큰 이상은, 희소한 재화를 두고 경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요.

그러한 경쟁 때문에 어디를 가든 똑같은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100명 중 1명이 갈 수 있는 대학을 가는 것과, 100명 중 1명이 뽑히는 연예기획사에 붙는 것과,

100명 중 1명만 ‘대박’이 나는 장사를 하는 것은 거의 똑같이 어려울 수밖에요.

경쟁의 어려움은 상대적인 것이니까.

당신이 정말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지 않는 이상은 그냥 공부를 선택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가는 넓은 길보다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좁은 길을 가겠다고요?

그 비유는 시대에 따라 상황이 변하는 경우에만 쓰이는 비유입니다.

예를 들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시’가 엄청난 인기를 끄는 시대여서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택했지만,

시대가 변한 지금 갑자기 경영대의 인기가 높아져서 ‘좁은 길’에 해당되었던 경영학을 택한 사람들에게 이득이 된 경우지요.

하지만 이는 ‘공부’에는 적용되지 않는 비유입니다.

학업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는 것은 벌써 동서양을 막론하고 1000년이 넘도록 굳어진 사회구조니까요.

따라서 공부라는 넓은 길을 놔두고 다른 좁은 길을 가겠다는 것은 똑똑하고 용감한 선택이 아닙니다.

넓은 길을 그냥 버리는 멍청한 선택입니다. 다른 길에 재능이 있는 몇몇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4) 공부보다 중요한 것은 사교성, 인간성, 사랑이나 우정 같은 인간적인 가치다.

- 맞는 말입니다. 딱 이 문장까지만 생각한다면 정말로 맞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말에 은근히 다른 의도가 깔려 있다는 겁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다보면 인간적인 가치는 소홀히 할 것이라는 생각을 통해 자신의 게으름을 정당화시키려는 것이죠.

하지만 이는 당신의 착각일 뿐입니다.

공부 잘 하는 애들이 인간적인 가치는 떨어져 보이는 이유는, 당신의 마음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려고 하기 때문이죠.

당신의 마음은 당신보다 우월한 사람을 보면 당신의 자존심이 상처받지 않도록,

자동적으로 상대방의 다른 결점을 찾아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찾아낸 결점에 대해서는 크게 부풀려서 평가하고, 상대방의 장점에 대해서는 인색하게 평가하게 되죠.

객관적으로 현실을 바라보면 당신이 가진 것은 게으름이고, 상대방이 가진 것은 착실함과 부지런함일 뿐입니다.

다른 조건은 변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은 사교성이 뛰어나고 공부 잘하는 학생은 그렇지 못하다거나,

당신에게는 우정이 있고 공부 잘하는 사람에게는 없거나 적다는 것.

이것은 실제가 아니라,

당산의 마음이 자동적으로 공부 외의 다른 조건들을 변형시켜서 상대방과 당신의 균형을 맞추는 것일 뿐입니다.

한마디로 착각인 것이죠.

공부 잘하는 학생에게도 나름의 인간관계가 있고, 친구가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오히려 부지런한 사람의 그것은 게으른 사람의 그것보다 뛰어날 확률이 높겠지요.

 

5)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인생의 다가 아니다.

일단, 좋은 대학 간다고 다 성공하나? 라는 물음에 답하겠습니다.

다가 아니지만 절반 이상입니다.

적어도 당신이 어느 곳에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하며 존재할지에 대해 막대한 영향을 미치니까요.

말했듯이 현대 사회에서 학업은 단지 외우고 응용하고 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사회의 희소한 가치를 배분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를 하면 다 성공한다.’라는 것이 존재할까요?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 ‘~’에 가장 가까운 것이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죠.

우리나라의 구조에서는, 누가 봐도 성공하는 길 중에 제일 쉬운 것이 공부로 좋은 대학 가는 거니까요.

“좋은 대학 간다고 성공하는 거 아니야!”라고 고함을 지르는 분들 중에서도 여기에 반박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성공했다고 다 훌륭한 인생인가? 에 대답하겠습니다.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학업을 쌓는 것은 단순히 성공하기 위한 노력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성공의 수단으로 여기더라도,

어디까지나 학업이란 것은 본래 정신적 수준을 키우는 것이고 그렇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이러한 학업을 통해 자신이 아는 만큼, 생각의 깊이만큼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정신연령이 5살에서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고 생각해봅시다.

그 사람 스스로는 자기 인생이 즐거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옆에서 보고 있는 당신이 생각하기에도 그 인생이 훌륭해 보이나요?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의 정신적 능력이 성장하지 못한다면 어떤 사람이 보기에는 당신의 인생은,

정말 유감스럽지만, 한심한 것일 수 있습니다. 결국 학업은 당신 인생의 격을 높이는 일입니다.

‘좋은 대학 가는 것이 인생의 다가 아니다’라는 말은 자기기만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정말로 ‘다’는 아닙니다. 하지만 ‘대부분’이지요.

‘좋은 대학 진학이 다가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은

‘돼지고기가 상했지만 나머지가 괜찮으니 이건 맛있는 제육볶음이야’,

‘시나리오가 막장이지만 다른 건 봐줄만하니 이건 좋은 영화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자기합리화일 가능성이 농후하지요.

 

6) 나는 정말로 노력하는데 머리가 좋지 않아서 어쩔 수 없다.

- 공부에 머리가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입니다.

주변의 명문대 학생들과 솔직한 대화를 나눠 보았을 때에도 모두들

‘머리 좋은 것은 공부에 정말 중요한 것 같다’라고 털어놓더군요.

하지만 그들은 동시에 ‘머리는 쓰는 만큼 좋아지는 것 같다’는 것에도 동의했습니다.

머리가 나쁜 것은 부모님의 탓도, 신이나 운명의 탓도 아닙니다. 당신이 머리를 게을리 쓴 탓이 가장 큽니다.

‘머리가 좋지 않아서 공부를 못해!’라는 말은,

매일 과식을 해서 뚱뚱해진 사람이 ‘난 뚱뚱해서 너무 불편함이 많아!’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10년 동안 찌운 살이 10주, 10개월 운동한다고 빠지지 않는 것처럼 머리도 빨리 좋아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머리를 열심히 굴리면, 굴린 만큼 머리는 좋아집니다.

 

7) 우리나라의 교육제도는 너무 잘못된 점이 많다. 또는 이 사회나 세상이 부조리하다.

- 물론 우리 교육제도에 부조리함이 많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상당히 정의로운 시스템입니다.

능력을 철저히 객관적으로 측정하여 상급 교육기관에 진학시키니까요.

적어도 능력에 맞지 않는 평가를 받는 사례는 거의 없습니다.

단지 문제라면 너무 경쟁이 치열하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지요.

하지만 인적자원으로 살아가는 우리나라에서 그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는 것이지, 부조리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육이 학생들의 독창성과 창의성을 짓밟는다는 주장도 옳지 않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인정할 만한 종류의 능력’은 뛰어나지 않은데

‘자기만 인정하는 종류의 능력, 자기 주변 사람들만 인정해주는 능력’만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스스로는 ‘자기만 인정하는 능력’이 자신의 독창성과 창의성이라고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자기만 인정하는 능력’의 실체는 ‘지독한 자기합리화가 만들어낸 아주 그럴싸한 환상’일 뿐입니다.

능력이란 것이 모든 또는 많은 사람이 보기에 훌륭한 것이어야지 혼자서 훌륭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우리나라에서, ‘사회가 인정하는 독창적 능력’을 가진 사람은 얼마든지 그 능력으로 성공할 길이 있습니다.

굳이 제도가 맘에 들지 않는다면, 훗날 높은 사람이 되어서 고쳐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제도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열공'하는 것 뿐입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투덜거리고만 있다면, 당신은 교육제도를 핑계거리로 삼는 것일 뿐입니다.

때로는 강자가 약자를 밟고 올라서는 이 세상을 부조리하다고 여기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원래 자연의 법칙이 그러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필연적으로 강함과 약함의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재화는 한정되어 있고, 인간의 욕구는 무한하므로 필연적으로 인간끼리의 경쟁이 생기고요.

그리고 필연적으로 강한 인간이 약한 인간을 이기고 더 많은 재화를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이겼다고 비난하는 것은, 약한 자들의 변명일 뿐입니다.

이를 비난하려면 아마 세상을 창조한 신을 비난해야 할 것입니다.

 

8) 다른 애들도 반 이상이 놀고 있다.

- 학생들이 저지르기 쉬운 오류 중 하나는,

노력은 다른 학생들 정도만 하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성취하는 것은 다른 학생들보다 훨씬 더 크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딴 애들도 다 그렇게 하는데’라고 생각하면서, ‘딴 애들도 다 가는 대학’을 가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죠.

특별히 좋은 대학에 가고 싶으면 특별히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이치에 맞습니다.

다른 애들과 똑같이 하면 다른 애들과 똑같은 삶, 아주 평범한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다른 애들이 공부할 때 공부하고, 놀 때 놀면 절대로 다른 애들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다른 애들이 열심인 만큼만 열심히 하면 다른 애들 이하이거나 비슷한 수준밖에는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특별함을 원하지 않습니까? 특별함을 원하면 노력도 특별해야 합니다.

다른 애들이 놀 때 공부하고, 다른 애들이 포기할 때 끝까지 붙잡고,

다른 애들이 대충 할 때 꼼꼼히 파고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당신은 이 세상에게 특별대우를 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9) 시간은 아직 충분히 남아 있다.

- 충분히 시간이 남아있다고 해서 지금 당신이 버리고 있는 시간의 가치가 하락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찌됐건 시간은 소중한 것이고, 그 시간을 이용해서 당신은 의미 있는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이제 시작해야지’하는 시점에서 당신이 시작한다면,

당신은 시간에 있어서는 우위를 점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앞서 말했지만, 당신이 평범한 것을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당신이 특별해지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남이 하는 이상을 해야 당신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남이 하지 않을 때 해야 이룰 수 있습니다.

충분히 시간이 남아 있을 때, 남들보다 일찍 시작하면 또는 남들보다 일찍 가속도를 높이면

당신은 그만큼 남들보다 특별해질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충분히 시간이 남아 있다고 하여 방심하다가, 결국 누구나 다 전력질주할 때 당신도 전력질주하기 시작한다면

이미 때는 늦은 것입니다. 당신이나 남들이나 공부하는 시간이 똑같이 한정되어버리니까요.

시간을 돌려서 쓸 수도 없는 노릇일 겁니다.

주로 수능을 1년 남긴 학생들이 이러한 문제에 빠지는 경우가 많지요. 아니, 거의 대부분이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어 버리지요.

시간이 많이 남은 것으로 느껴지나요? 시간은 버렸다가 다시 주울 수 없습니다.

나중에 정신을 차려도 절대 만회할 수 없는 것이 시간입니다.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재수를 통해 1년의 인생을, 그것도 청년기의 1년을 버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10) 해도 안 될 거다. 또는 되어도 별 것 없을 거다.

- 전형적인 ‘여우와 신포도의 오류’입니다.

이솝 우화에서 여우가 포도를 따먹으려다가 실패하자, 여우가 “저건 너무 시어서 맛이 없는 포도일거야”라고 말했다 하지요.

해도 안 될 것이라는 것이, 당신이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안 될 것 같아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인생이 걸려 있으니까요.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해야 되는 것이 공부입니다.

해도 망할 것 같나요? 하지만 안 하면 완전히 망합니다. 그러나 만일 제대로만 한다면, 언제든 희망은 있습니다.

 

 

 

드라마나 영화에는 ‘공부는 못하지만 인간성이 좋은 캐릭터’가 참 많이 나오죠.

아니, 드라마와 영화 속 세계에서는 공부 못하면 거의 무조건 착하다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실에도 그런 캐릭터가 그렇게 많을까요? 적어도 드라마와 영화에 나오는 것보다는 훨씬 적을 겁니다.

스크린 속의 세계는 작가가 지어낸 세계이며, 작가는 스스로 공부를 못한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그런 캐릭터를 삽입하는 거죠.

 

그러한 스토리를 즐기는 것 까지는 나쁘지 않지만, 현실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지방 모 대학에서 신입생 환영회가 문란하여 뉴스에 나오고, 모 비주류 체대에서 후배 폭행 사건이 연달아 나왔습니다.

반면 서울대학교는 (적어도 제가 보기엔) 상호간의 예의가 너무 잘 지켜져서 심심할 정도입니다.

여기서는 술이나 벌칙을 거부하는 신입생에게는 절대로 그것을 강요하지 않고,

친해지기 전까지는 선배도 후배에게 존댓말을 씁니다.

인간성이니 인간관계니 하는 모호한 말로 이루어지는 자기합리화를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상보적 심리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잘 하면, 다른 것은 못할 거라고 믿는 심리죠.

예를 들어 공부를 잘 하면 다른 것은 못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

그러나 현실에서는 가장 중요한 하나를 잘 하는 사람이 부수적인 것까지 모두 잘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반대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면 거의 모든 것을 놓치는 경우가 많고요.

하나에서 우위를 점하면 다른 것에서도 우위를 점하기 유리해지기 때문이죠.

이것이 소위 ‘엄친아’라 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입니다.

머리가 엄청 좋아서 공부도 잘하고, 예체능을 배워도 빨리 배우고, 인간관계에서 처신도 잘하는,

그런데 알고 보니 부모님도 명문대를 나온 똑똑한 분들인 경우!

현실은 주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지요. 이런 현실을 반대로 이야기해서 사랑받는 것이 영화나 드라마, 삼류 소설이고.

 

축구선수가 발을 잘 쓰지 못한다면 온갖 불리한 점들이 생길 겁니다.

슈팅이든, 드리블이든, 패스든 전부 그 능력치가 하락하겠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직업이 학생인 사람이 공부를 못하면 온갖 좋지 못한 일들이 따라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께 훈계를 듣고 귀찮을 일들이 생기며, 집에 와서도 잔소리를 듣고 눈치를 보게 되며,

밖에 나가 놀 때에도 마음이 불안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도 마음이 갑갑하겠지요. 별 것 아닌 일도 더 짜증이 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화가 나고 반항심이 생겨서 어찌어찌하다보면 문제아라는 딱지가 찍혀버리는 경우까지 생깁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미래가 점점 망가진다는 거죠.

 

그러므로 그냥 인정해야 합니다.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고.

공부 잘 하면 나머지 모든 변명, 합리화 같은 구질구질한 것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냥 깔끔하게 공부를 잘 해버리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만약 지금까지 이러한 자기합리화의 마음이 있었다면,

그 벽을 허물어버리고 이제 문제 상황 앞에 당당히 나서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댓글로 자기합리화라는 병에 절대로 걸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해봅시다.

저도 여러분이 부디 자기합리화의 늪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자기합리화에서 벗어나 자신의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는 모든 학생들이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출처 : 100ball.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