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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내일>은 ‘입학사정관제 논란’을 다룬 지난 기획 기사에서 ‘학교생활기록부’를 정성적으로 평가하는 흐름은 불가피하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최근 입학사정관 전형을 학생부 중심으로 운영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정부에서 발표한 가이드라인이나 ‘2013 학생부 기재 요령 개정안’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교육 요소를 배제한 교내 활동 중심의 학생부로 대입 수시의 무게중심이 급속히 옮겨가는 모양새니까요. 대학 입학사정관은 실제 학생부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합격생의 학생부에 교내 활동은 어떻게 기록됐는지, 면접 과정에선 무엇을 검증하는지 들여다보니 우리는 그간 참으로 견고한 ‘선입견’의 벽 안에 갇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평가돼온 ‘기록 창고’, 학생부의 재발견.

 

 
 

평균 2등급에 가까운 내신성적에 수능 성적도 합격선에 턱없이 부족했지만, 입학 사정관 전형으로 고려대 식품자원경제학과에 합격한 어준규 학생. 긴장을 풀라고 놓인 면접장의 음료수를 아무도 선뜻 손대지 않을 때 벌컥벌컥 들이켠 것은 ‘경제’에 대한 열정만은 자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 한영고를 졸업한 그의 학생부에는 고교 3년의 기록이 고스란히 담겼다. 고1때부터 활동한 경제 동아리지도 교사가 고3 담임이 된 이 ‘행운아’의 주요항목별 학생부와 그 안에 담긴 스토리를 낱낱이 공개한다.

취재 정애선 기자 asjung@naeil.com
사진 전호성
 
 
 
수시 지원 6회 중 5회를 입학사정관 전형에 투자할 만큼 애정(?)이 컸던 고려대 식품자원경제학과 1학년 어준규 학생. 그 역시 처음에는 스펙의 양이 많을수록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무작정 활동량을 늘렸다. 하지만 입시철이 되어 정리하다 보니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자기소개서에 쓸 자리도 없을뿐더러, 겹치는 스펙이 생기면 어차피 쓸모없어지더라고요. 제 스펙 중에 경제신문 청소년 기자 활동이 그런 경우인데, 동아리지 편집장에 묻혀 결국 한 줄도 들어가지 못했어요. 일단 쌓고 보자는 마음으로 본 한국사능력검정시험 1급도 마찬가지고요.”
불안한 마음에 잠시 기웃거린 면접 학원에서 만난 친구들의 스펙은 쟁쟁했다. 외교관 부모를 둔 덕분에 5개국 거주에 외국어 구사력까지 갖춘 아이들을 보면서 기가 죽기도 했지만, 돌이켜보니 대학에서는 ‘진정성 있는 스토리’를 본다는 데 확신이 생겼다고. 자신이 11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비결은 학교 프로그램을 충실히 따라간 과정이 자연스럽게 성과물로 이어진 덕분이기 때문이다. 그의 학생부와 비하인드스토리를 찬찬히 되짚어보자.
 
 
막연하게 사람을 위하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내가 가장 잘하는 걸로 최고가 돼 남들이 행복해지면, 나도 행복할 것 같았거든요. 또래에 비해 말을 잘하는 편이어서 변호사가 되어 사회를 이롭게 하자 싶어 1학년 때 꿈은 법조인이었죠. 사람 만나는 걸 워낙 좋아하다 보니 많은 이들과 소통하고, 이를 반영하는 직업이 뭐가 있을까 하다 2학년 때 꿈은 정치가로 바뀌었어요. 3학년 때는 경제학이 재미있더라고요. 이 학문으로 세상을 윤택하게 만드는 경제학자가 되기로 했죠. 왜 꿈이 바뀌었는지 면접 때 질문을 받았어요. “가치관은 같지만, 생각이 커가면서 표현하는 수단이 바뀐 것 같다”고 대답했더니 수긍하시던데요. 대학에 오고 나서는 막연하던 경제학에서 미래 기후변화에 대비한 식량 문제 해법을 연구하는 식품자원경제학으로 관심사가 더 옮겨왔답니다.
 
내신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어요. 2등급에 가까운 1등급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경제를 좋아했기 때문에 이런 활동을 해왔잖아요. 경제 성적이 좋아야 하는 건 기본이죠. 3학년 1, 2학기 경제 과목 성적이 모두 1등급이었는데, 입학사정관들이 가장 관심을 보인 부분이기도 해요. 사회 과목도 2학년 때는 모두 1등급이었고요. 전 과목 내신 평균 등급이 좋지 않아도 너무 자신감을 잃을 필요는 없습니다. 입학사정관들은 서류를 끝까지 봐주기 때문에 자기소개서에 언급하면 찾아봐요.
 
열정을 가지고 꾸준히 하면 결과가 좋아지는 건 필연적이에요. 전 정말 경제가 좋고, 재미있었어요. 제 수상 경력을 보면 계속 향상됐다는 게 특징인데, 은상에서 출발해 금상을 거쳐 대상으로 이어진 교내 경시대회나 5급에서 시작해 3급, 1급으로 높아진 테셋이 대표적이죠. 사실 테셋을 처음 치른 건 동아리 대항전 때문이었기에 성적이 안 좋은 게 당연했어요. 그러다 경제가 점점 좋아지면서 이 시험이 생각나 공부 좀 하다 보니 3급이 나왔고, 3학년 초 친구가 같이 보자고 해서 쫄래쫄래 갔더니 1급이 나오더라고요.
 
제 학생부를 보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내용이 1학년 때부터 활동한 ‘시사경제반’ 동아리와 관련된 거예요. 이 부분은 학생들 스스로 기획하고, 실행하고, 끝낼 수 있도록 엄청난 자율권을 준 학교와 그 과정에서 모든 걸 책임지고, 관리?감독해주신 선생님들께 받은 혜택인 것 같아요. 동아리 연합 체험 학습을 기획할 때 사전 보고서 작성과 현장에서 진행한 세미나, 돌아와서 결과 보고서 작성까지 전부 저희가 했어요.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와 숙소 예약은 물론이고요. 동아리 지도 선생님과 협의하고, 조언을 구하느라 하도 교무실에 눌러앉아 있어서 다른 선생님들이 그만 좀 오라고 할 정도였다니까요. 하하. 이런 선생님을 만난 건 분명 행운이지만, 과정에서 이뤄내는 건 결국 자기 몫임을 기억했으면 해요.
 
학교에서 어느 날 캠페인을 기획해보라는 거예요. 이건 뭐지? 어떻게 하는 거지? 무작정 시작해보기로 했어요. 공정 무역처럼 노동의 가치를 생각하고 10대에게 맞는 소비를 하자는 ‘스마트 소비’를 캠페인 주제로 정하고, 20장 분량 기획서를 제출했어요. 동영상 UCC에 피켓, SNS 페이지도 만들어보기로 거창하게 계획은 세웠는데, 저 혼자 모든 걸 할 수는 없잖아요. 동영상 잘하는 친구를 섭외해 역할을 맡기고, 손재주가 좋은 친구에게는 피켓을 부탁했어요. 그전에는 제가 직접 해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었는데, 이 과정을 통해 남들과 일을 나누는 ‘협동’의 힘을 배웠어요. 학교에서도 그 역량을 키우려고 이런 장을 열어준 것 같아요.
 

30분 동안 진행된 면접 중 절반 가까운 시간은 제가 3학년 8월쯤 완성한 논문 ‘명일동 일대 닭강정 시장 경쟁 요소 분석 및 경영 전략 제시 : 닭강정 초한지’에 대한 질문이었어요. 우연한 계기로 찾은 주제죠. 집 근처에 닭강정 가게가 생겼는데, 반값 할인을 하더라구요. 줄이 엄청 길었는데, 제 바로 앞에서 닭이 떨어졌다는 거예요. ‘나는 정가를 내고도 사 먹을 용의가 있는데, 왜 먹지 못하지?’ 화가 나더라고요. 그래서 첫 주제는 ‘지나친 가격 할인이 시장 효율성과 사회적 후생 감소에 미치는 영향’이었어요. 그러다 이 방향보다 새로 생긴 닭강정 가게 두 곳의 경쟁 구도가 눈에 들어와서 주제를 경쟁 요소 분석으로 틀었죠. 고객 300명을 상대로 친구와 함께 설문 조사를 하고, 그동안 쓴 추상적이고 뻔한 논문에서 벗어나보려고 고3 때 진짜 재미있게 본 드라마 <샐러리맨 초한지>에서 모티프를 따오기도 했어요.


그런데 교수님이 “자네 논문은 제목부터 허위고, 결론이 상당히 부실한 문제점이 있네. 이제 어떡할 건가” 물으시는 거예요. 순간 ‘아차’ 싶어 논문을 제출한 걸 후회했죠. 하지만 이어진 교수님의 말씀은 용기를 얻기 충분했어요. “하지만 난 자네 이런 아이디어가 마음에 드네, 어느 대학에 가서든 이런 논문을 쓰는 참신함과 아이디어를 잃지 말게.” 이런 논문을 평생 봐온 교수님들이 고등학생이 쓴 논문에 얼마나 많은 걸 기대하겠어요. 결과보다 고등학생이기에 가능한 참신한 시도, 그 과정에서 겪은 실수나 시행착오를 스펙보다 큰 자산으로 인정한다는 확신을 얻었어요."

 

 

출처 : 미즈내일